제주의 책방을 산책하다. 책방섬책 두 번째, 이듬해 봄.

어릴 적엔 엄마 손을 잡고 동네에 있는 작은 서점을 구경하곤 했다. 서점에서 내가 집는 것은 주로 동화책이었다. 그림이 많아 앉은자리에서 휙휙 내용을 훑어볼 수 있는 그림책. ‘강아지똥’이라는 권정생 선생님의 유명한 동화가 아직도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어있는 걸 보면, 그림책이라는 장르가 어린이들에게 주는 인상은 꽤 강렬하면서도 오래가는 것 같다.

어릴적 동네의 작은 서점 안에는 주로 동물들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이 많았다. 아마 나처럼 엄마 손을 잡고 그 공간을 방문하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림책 뿐 아니라 자그마한 서점이 주던 작고 안온한 분위기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나이를 먹어서도 책이 많은 공간에 들어가면 기분이 편안해지는 건 어린 시절의 기억 덕분일지도 모른다.

모슬포 어느 골목에 위치한 작은 서점 이듬해 봄은 그런 옛 동네 서점을 떠오르게 한다. 마당을 지나 오래 된 주택을 개조한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크기는 작지만 알찬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왼쪽에는 독립출판물이, 오른쪽에는 서점 주인이 직접 고른 책들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이런 모습에서 작지만 서점의 본질을 지키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정면의 테이블에는 다양한 동물들을 주제로 한 책들이 놓여 있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동행인은 그 테이블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책방의 사장님이 아이들과의 삶, 가정을 중요시하는 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동네 아이들이 많이 들르는 책방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책들이 제법 많았다. 여기서 내가 생각한 아이의 기준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그림책이 많았고, 그래서 더더욱 어릴 적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인스타그램의 설명에 적혀있는 문제집을 팔지 않는 책방이라는 표현이 그래서 더더욱 오롯이 와 닿았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으며 자라지만, 문제는 그것이 입시와 공부를 위한 책이라는 점이다. 순전히 재미를 위한 독서를 많이 할 시간도, 기회도 잘 없는 아이들이 이런 책방에서 조금이나마 문제집과 입시를 위한 책이 아닌 다양한 책들을 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이들을 위한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주에 있는 책방이라서인지 제주도에 사는 작가들의 제주도와 관련된 책이 많다는 것이 재밌는 점이었으며(제 책도 놔주세요 사장님), 독립출판으로 나온 개성있는 책들 역시 알차게 구성되어있었다. 요즘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작은 책방들이 ‘독립서점’이라는 표현을 빌리기엔 다소 민망한, 베스트셀러나 대형 출판사의 책들을 주로 갖춰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독립출판물을 취급하는 이런 작은 책방의 발견은 책을 좋아하는 제주 이민자로서는 무척 즐거운 일이다. 이건 아마 책을 좋아하는 여행객들에게도 꽤 즐거운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독립출판물만의 톡톡 튀는 생각과 아이디어들이 담긴 책들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자극이 된다.

나는 이곳에서 요즘 독립출판계에서 꽤 화젯거리라고 들었던 브로드컬리의 로컬숍 연구 잡지 시리즈 중, <서울의 3년 이하 빵집들:왜 굳이 로컬 베이커리인가?> 와 헤르만 헤세의 봄과 관련된 시들을 엮은 <봄>이라는 책을 샀다. (물론 예전에 왔을 때도 책을 몇 권 더 사기는 했다. 김영하 작가는 말했다. 책은 읽을 책을 사는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라고.) 전자는 독립서점 편을 살지, 제주도 이민 편을 살지 고민하다가 베이커리를 좋아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조금 더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샀다. 후자는, 봄이라서. 그리고 책방이 이듬해 봄이라서 골랐다. 1차원적인 선택이지만, 선택은 역시 별 고민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보통 제주의 작은 책방들은 아무리 SNS나 인터넷상에서 유명하다고 해 봐야 기본적으로 책을 파는 공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좋을 때도 있지만, 혼자 조심스레 방문한 작은 책방에서 주인분의 기척을 느끼며 책을 고를 때마다 민망한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이듬해 봄의 사장님은 그럴 때마다 차를 한 잔 주시면서 과하지 않은 친화력으로 방문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런저런 책 추천도 받고, 이야기도 나누다 보면 책방이 아니라 책이 많이 놓인 이웃의 작은 서재에 온 듯한 느낌이다. 서점 이듬해 봄은 책도 책이지만 사람과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책방섬책의 한 줄

"그러나 봄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여름을 기다리는 즐거움이다."

- 헤르만 헤세,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중에서

주관적인 평

분위기: 작지만 책방의 본질에 충실하고 있다.

책 큐레이션: 독립출판물이 꽤 충실하게 갖추어져 있다. 주기적으로 달라지는 사장님의 큐레이션도 매력적.

접근성: 모슬포의 한적한 어느 마을에 위치해있다. 모슬포는 가파도나 마라도를 가기 위해 오는 곳이기도 하다. 근처에 산방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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